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클라우스 폰 리히텐라데 (문단 편집) === 제국의 중신 === 젊었을 적 이야기는 거의 나오지 않지만 [[주산나 폰 베네뮌데]] 후작부인의 증언에 따르면 과거 베네뮌데 후작부인이 황제의 총애를 독점할 때만 해도 리히텐라데는 그저 중견 궁정관료에 불과하여 후작부인 앞에서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후작부인이 말을 걸지 않으면 대화조차 나눌 수 없는 몸이었다고 한다. 참고로 베네뮌데 후작부인이 프리드리히의 애첩이 된 것은 원작 16년 전인 우주력 780년이고, 후궁이 된 것은 786년이다. 즉, 리히텐라데는 국무상서에 오르고 나서도 한동안 문벌귀족들의 뒤치다꺼리만 하던 신세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리히텐라데는 제국의 관례와 관습을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구사하고 때에 따라서는 황제의 의견까지 동원하여 승진을 거듭했다. 그는 강한 권력욕을 가지고 있었지만 대외적으로는 그렇지 않은 것처럼 행동했고, 그의 진상을 잘 아는 몇 안되는 사람들은 리히텐라데의 음모로 궁정에서 쫓겨나버렸다. 리히텐라데는 내무상서, 궁내상서, 재무상서를 역임하며 큰 탈 없이 업무를 수행했고, 10년 전 국무상서에 올라 정부를 통솔하고 내각회의를 주재했다. 정무에 관심이 없던 프리드리히 4세는 리히텐라데를 신뢰했으며, 그의 일처리에 이의를 제기하는 법이 없었다. 리히텐라데 역시 프리드리히 4세에 충성했으며 프리드리히 4세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고 무난하게 국정을 운영했다. 따라서 리히텐라데의 재임기간 내내 별다른 위기나 거대한 사건사고가 생기지는 않았지만 리히텐라데가 진보, 개혁과는 인연이 없던 보수적인 사람인 탓에 제국은 타성에 젖어 안에서부터 썩어가고 있었다. 한편 리히텐라데는 궁정에 오래 몸담으면서 무수한 정적을 추방한 결과 [[오토 폰 브라운슈바이크]] 공작과 [[빌헬름 폰 리텐하임]] 후작을 제외하면 정적이 없었다. 리히텐라데는 자신의 권력과 제국의 미래를 위해 두 사람이 국정에 간섭하는 꼴을 볼 생각이 없었기에 그들을 견제하고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